스뱌토슬라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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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뱌토슬라프 1세는 10세기 키예프 대공국의 통치자로, 슬라브어 기원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루스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 945년 아버지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이 사망한 후 어린 나이에 키예프 대공이 되었고, 어머니 올가가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964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여 하자르 카간국을 정복하고 불가리아를 침공하는 등 영토 확장을 위한 군사 원정을 이끌었다. 972년 불가리아 원정 중 페체네그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키예프 루스는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을 겪었다. 스뱌토슬라프는 뛰어난 군사적 업적으로 인해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다양한 예술 작품과 대중문화 콘텐츠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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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의 올가는 10세기 키예프 루스의 통치자이자 이고르 1세의 부인으로, 남편의 암살 후 섭정으로서 드레블랴네인에 대한 잔혹한 복수, 세제 개혁을 통한 중앙 집권화 강화, 그리스 정교로의 개종을 통해 루스의 기독교화에 영향을 미쳐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 키예프 공작 - 아스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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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뱌토슬라프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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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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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키예프 대공 |
재위 기간 | 945년–972년 |
섭정 | 올가 (945년–962년) |
선임자 | 이고리 1세 |
후임자 | 야로폴크 1세 |
칭호 1 | 노브고로드 공작 |
재위 기간 1 | 945년–970년 |
후임자 1 | 볼로디미르 1세 |
배우자 | 프레드슬라바 |
자녀 | 야로폴크 1세 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 볼로디미르 1세 |
왕조 | 류리크 왕조 |
종교 | 슬라브 신화 |
아버지 | 이고리 1세 |
어머니 | 올가 |
출생일 | 943년경 |
출생지 | 키예프 |
사망일 | 972년 (28–29세) |
사망지 | 호르티차 |
이름 | |
고대 동슬라브어 | Свѧтославъ Игорєвичь (Svętoslavŭ Igorevičǐ) |
러시아어 | Святослав Игоревич (Svyatoslav Igorevich) |
우크라이나어 | Святослав Ігорович (Sviatoslav Ihorovych) |
벨라루스어 | Святаслаў Ігаравіч (Svyataslaŭ Iharavich) |
고대 노르드어 | Sveinald Ingvarsson (스베이날드 잉그바르손) |
2. 이름
스뱌토슬라프는 원초 연대기에 기록된 슬라브어 기원 이름으로 키예프 대공국의 최초의 통치자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다른 중세 슬라브 국가들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네스토르 연대기는 그의 전임자들의 이름이 고대 노르드어 형태였던 것과는 달리, 스뱌토슬라프를 슬라브어 기원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키예프 루스 통치자로 기록하고 있다.[5][6][7]
945년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과 올가 대공비의 아들로 태어났다.[9] 945년 아버지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이 드레블랴네족에게 살해당하면서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으나, 당시 나이가 어려 어머니 올가가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9] 올가는 드레블랴네족에게 4단계에 걸쳐 복수하고 나라를 정복했는데, 이 전투에 어린 스뱌토슬라프도 참가하여 개전 시 군대 선두에서 적에게 창을 던졌다고 한다.[53]
일부 학자들은 "성스러운"과 "영광"에 대한 슬라브어 어근으로 구성된 스뱌토슬라프라는 이름을 그의 전임자 올레그와 류리크의 이름을 결합한 인위적인 파생어로 보고 있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러한 이름 번역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슬라브어 이름의 노르드어 표현인 '''스베이나르드''' 또는 '''스베넬드'''는 스뱌토슬라프와 동일하다.[8] 10세기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의 그리스어 저서 De Administrando Imperio("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는 그의 이름이 ''Σφενδοσθλάβος''("스펜도스트라보스")로 기록되어 있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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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뱌토슬라프는 아스무드(Asmud)라는 바랑인(Varangians)에게 교육을 받았다.[10] 통치자의 아들을 위한 바랑인 가정교사 고용 전통은 11세기까지 이어졌다. 스뱌토슬라프는 964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는데, 행정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그의 드루지나(druzhina, 친위대)와 함께 이웃 국가들과의 지속적인 전쟁에 몰두했다.[11][54]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스뱌토슬라프는 원정에 수레나 주전자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고, 고기를 삶지 않고 숯불에 구워 먹었으며, 천막 없이 말안장을 베개 삼아 잠을 잤다.[12] 그의 모든 수행원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스뱌토슬라프는 눈이 밝은 평균 키의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으며, 머리는 대머리에 숱이 적은 수염, 숱이 많은 콧수염과 귀족의 표시로 측면 머리카락(Czupryna)을 길렀다.[13] 흰색 옷을 선호했으며, 옷은 부하들의 옷보다 훨씬 깨끗했지만, 전사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카룬큘(Carbuncle (gemstone))과 두 개의 진주(pearl)가 박힌 큰 금 귀걸이 하나를 착용했다.[14]
967년, 스뱌토슬라프가 이끄는 키예프 루스 군은 불가리아 제국에 침공하여 불가리아군을 격파하고 도나우 북안의 80개에 달하는 요새를 점령했다.[34][35][36][37][38] 이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니케포로스 2세가 불가리아 내전을 기회로 키예프 대공국과 연합하여 남북에서 불가리아를 협공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스뱌토슬라프는 도나우 강 하구에서 약 80km 상류에 위치한 요충지 페레야슬라베츠(현재 몰도바 영토)에 입성하여 이곳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페체네그족이 키예프를 포위하자,키예프를 포위했다. 섭정 올가와 군 사령관 프레티치 등의 지휘 아래 간신히 페체네그족의 공격을 견뎌내고 스뱌토슬라프에게 급히 귀국할 것을 요청했다. 스뱌토슬라프는 급히 키예프로 돌아와 페체네그족을 격퇴했지만, 어머니와 귀족들에게 키예프에서 페레야슬라베츠로 거처를 옮길 것을 선포했다. 올가는 이 결정에 반대했지만, 스뱌토슬라프는 굳은 결의를 보였고, 올가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
사흘 후 올가가 사망하자, 스뱌토슬라프는 장남 야로폴크를 키예프에, 차남 올레그를 드레블랴네족의 땅에, 삼남 블라디미르를 노브고로드에 각각 분봉하여 후방의 걱정을 없애고, 많은 종사단을 이끌고 페레야슬라베츠로 이주하여 이후 이곳을 근거지로 발칸 반도로의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했다.
971년 초, 스뱌토슬라프가 이끄는 루스 군은 다시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루스 군은 먼저 불가리아에 탈환당했던 페레야슬라베츠를 재점령하고 도나우 강 유역을 제압했다. 더 남하하여 동로마 제국령 트라키아(Θράκη)에 침입하여 필리포폴리스(Φιλιππούπολις)를 점령했다. 그러나 여기서 동로마 황제 요한네스 1세 침이스케스(Ιωάννης Α' Τσιμισκής)가 반격에 나서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루스 군을 패퇴시키고, 패주하는 루스 군을 추격하여 불가리아에 들어가 불가리아의 수도 프레스라프(Преслав)를 탈환했다.[55]
스뱌토슬라프는 도나우 강 하구 부근 불가리아 북부의 시리스트라(Силистра)까지 후퇴하여 2개월 동안 이곳에 농성했다. 그 후 루스 군은 성을 나와 동로마의 포위군을 돌파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스뱌토슬라프는 어쩔 수 없이 요한네스 1세와 강화하고 발칸반도(Βαλκάνια)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약속했다. 이 강화에서 비잔티움 측은 루스의 불가리아 침략을 묵인했다.[55]
두 차례에 걸친 불가리아 원정은 결국 루스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이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불가리아 제국은 급속도로 약체화되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에 의한 재정복의 길을 걷게 된다.
945년 아버지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이 드레블랴네족에게 살해당하면서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나이가 어려 어머니 올가가 섭정을 맡았다.[43] 964년부터 친정을 시작해 발칸반도 원정에 나서는 등 키예프 대공국의 세력을 확장했다.[43]
972년 불가리아 원정 도중 전사했는데, 비잔티움 황제가 페체네그 칸 쿠랴를 부추겨 스뱌토슬라프를 죽이게 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토스가 저서 『국정론』에서 러스와 페체네그 사이의 분쟁을 조장하는 정책을 제시한 것과 일맥상통한다.[43]
『초록 연대기』에 따르면, 스뱌토슬라프는 드니프르강(Днепр) 급류를 건너려다 페체네그족의 매복에 걸려 살해당했으며, 그의 두개골은 페체네그 칸에 의해 술잔으로 만들어졌다.[44][57] 키예프로 돌아가기 위해 드네프르강을 거슬러 올라가려 했으나, 항해 중 급류라는 난관에서 페체네그족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강 하구 부근에서 겨울을 지냈다. 그러나 이듬해 봄이 되어도 페체네그족은 여전히 떠나지 않았고, 그는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행 돌파를 시도했으나, 선단은 급류에서 페체네그족의 공격을 받아 전멸했으며, 스뱌토슬라프 자신도 살해당했다.[57]
스뱌토슬라프의 죽음과 함께 루시의 "영웅 시대"도 막을 내렸고, 이후 장남 야로폴크가 대공 지위를 계승했다. 스뱌토슬라프 사후, 그의 아들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적자 아들인 올레그와 야로폴크 1세 사이에 976년 전쟁이 발발했고, 그 결과 올레그는 죽임을 당했다. 977년, 블라디미르 1세는 올레그의 운명을 피해 해외로 도망쳤고, 바랑인 군대를 모아 978년 귀국했다. 야로폴크는 살해되었고, 블라디미르는 키예프 루스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3. 1. 초기 생애와 성격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과 올가 대공비의 아들로 태어났다.[9] 945년 아버지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이 드레블랴네족에게 살해당하면서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으나, 당시 나이가 어려 어머니 올가가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9] 올가는 드레블랴네족에게 4단계에 걸쳐 복수하고 나라를 정복했는데, 이 전투에 어린 스뱌토슬라프도 참가하여 개전 시 군대 선두에서 적에게 창을 던졌다고 한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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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뱌토슬라프는 아스무드(Asmud)라는 바랑인(Varangians)에게 교육을 받았다.[10] 통치자의 아들을 위한 바랑인 가정교사 고용 전통은 11세기까지 이어졌다. 스뱌토슬라프는 964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는데, 행정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그의 드루지나(druzhina, 친위대)와 함께 이웃 국가들과의 지속적인 전쟁에 몰두했다.[11][54]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스뱌토슬라프는 원정에 수레나 주전자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고, 고기를 삶지 않고 숯불에 구워 먹었으며, 천막 없이 말안장을 베개 삼아 잠을 잤다.[12] 그의 모든 수행원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스뱌토슬라프는 눈이 밝은 평균 키의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으며, 머리는 대머리에 숱이 적은 수염, 숱이 많은 콧수염과 귀족의 표시로 측면 머리카락(Czupryna)을 길렀다.[13] 흰색 옷을 선호했으며, 옷은 부하들의 옷보다 훨씬 깨끗했지만, 전사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카룬큘(Carbuncle (gemstone))과 두 개의 진주(pearl)가 박힌 큰 금 귀걸이 하나를 착용했다.[14]
3. 2. 섭정 기간: 올가의 통치와 드레블랴네족 정복
945년 아버지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이 드레블랴네족에게 살해당하면서 스뱌토슬라프가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올가가 섭정을 맡았다. 964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3. 3. 팽창 정책과 군사 원정
945년 자신의 아버지인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이 드레블랴네족들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다. 964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다.[21]
스뱌토슬라프 1세는 즉위 직후 볼가 유역과 폰토-카스피아 초원 지역에 대한 키예프 루스의 지배력 확장을 위한 군사 원정을 시작했다. 그의 가장 큰 성공은 수 세기 동안 동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던 카자르를 정복한 964년-965년 스뱌토슬라프의 카자르 원정이었다. 카자르와 루스 사이의 갈등 원인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아 여러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루스는 카자르가 볼가를 통해 운송되는 상품에 대해 관세를 징수했기 때문에 볼가 무역로에 대한 카자르의 지배를 제거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역사가들은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누스 1세 레카페누스 치세에 유대인 박해 이후 비잔티움과 불화를 빚은 카자르에 맞서 루스를 선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21]
스뱌토슬라프는 먼저 카자르의 동슬라브 속국 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뱌티치족처럼 그에게 가담하지 않은 부족들은 공격을 받았고 카자르가 아닌 키예프 루스에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당했다.[22] 초기 연대기에 기록된 전설에 따르면, 스뱌토슬라프는 뱌티치 지도자들에게 "너희에게 가겠다!"(고대 동슬라브어 )라는 간결한 메시지를 보냈다.[23] 이 문구는 현대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에서 (보통 )로 잘못 인용되지만, 누군가의 의도를 명확하게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카 강과 볼가 강을 따라 진격한 그는 볼가 불가리아를 공격했다. 그는 카자르와 불가리아의 우수한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아마도 오구즈 투르크와 페체네그 용병들을 고용했을 것이다.[24]
스뱌토슬라프는 965년경 카자르 도시 사르켈을 파괴했고, 아마도 크리미아의 카자르 도시 케르치를 약탈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점령하지는 않았다.[25] 그는 사르켈에 벨라야 비예자("흰 탑" 또는 "흰 요새", 사르켈의 동슬라브어 번역)라는 루스 정착지를 건설했다.[26] 이후 그는 카자르의 수도 아틸을 파괴했다.[27] 스뱌토슬라프의 원정 직후 아틸을 방문한 한 사람은 이렇게 적었다. "루스가 공격했고, 포도나 건포도 하나 남지 않았고, 가지에 잎사귀 하나도 남지 않았다."[28] 그의 카자르 원정의 정확한 연대기는 불확실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미하일 일라리오노비치 아르타모노프와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사르켈 약탈이 아틸 파괴 이후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29]
이븐 하우칼은 스뱌토슬라프에 의한 사만다르 약탈을 보고하지만, 루스 지도자는 카프카스 산맥 북쪽 카자르 중심지를 영구적으로 점령하려고 하지 않았다. 키예프로 돌아가는 길에 스뱌토슬라프는 오세티아인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복속시켰다.[30] 따라서 카자르의 후계 국가들은 그 지역에서 불안정한 존재를 계속했다.[31] 카자르 제국의 몰락은 키예프 루스가 초원을 가로질러 흑해를 횡단하는 남북 무역로를 지배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무역로는 이전에 카자르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더욱이 스뱌토슬라프의 원정은 살토보-마야키 문화 지역에 슬라브인 정착을 증가시켜 숲과 초원 사이의 전이 지역의 인구 통계와 문화를 크게 변화시켰다.[32]
즉위 후 이듬해인 965년에 동쪽으로 군대를 진격하여 오카 강 유역에 거주하던 뱌티치족과 싸웠다. 뱌티치족이 하자르 카가나트에 복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하자르 원정을 결심했다. 볼가 강 상류의 볼가 불가르 왕국을 거쳐 하자르 본토로 침입했다.
하자르는 서돌궐의 멸망 이후, 북서 유라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는 반유목 반농경 국가였으며, 그 영토는 볼가 강 하류를 중심으로 카스피해 북쪽 해안, 코카서스 북쪽 기슭, 흑해 북쪽 해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스뱌토슬라프는 투르크계 유목민인 구즈족과 연합하여 카간(왕)이 직접 이끄는 하자르 군대를 손쉽게 무찔렀고, 그 영토를 유린했다. 수도 이틸을 파괴한 데 이어 사르켈, 사만다르 등 하자르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했고, 코카서스 지방의 알란인과 체르케스인, 흑해 북쪽 해안의 톰토로칸 공국, 그리고 뱌티치족 등 하자르의 영향하에 있던 여러 국가와 세력들을 제압했다. 이 일련의 전투로 하자르 카가나트는 사실상 붕괴되었지만, 루스는 초원 지대를 확보할 힘이 없었고, 빈자리가 된 옛 하자르 영토에는 새로운 유목민인 페체네그족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루스에 의한 하자르 정복은 일반적으로 966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하우칼은 968년으로 전하고 있다.
3. 3. 1. 하자르 카간국 정복 (965년 ~ 969년)
945년 자신의 아버지인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이 드레블랴네족들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다. 964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다.[21]
스뱌토슬라프 1세는 즉위 직후 볼가 유역과 폰토-카스피아 초원 지역에 대한 키예프 루스의 지배력 확장을 위한 군사 원정을 시작했다. 그의 가장 큰 성공은 수 세기 동안 동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던 카자르를 정복한 964년-965년 스뱌토슬라프의 카자르 원정이었다. 카자르와 루스 사이의 갈등 원인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아 여러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루스는 카자르가 볼가를 통해 운송되는 상품에 대해 관세를 징수했기 때문에 볼가 무역로에 대한 카자르의 지배를 제거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역사가들은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누스 1세 레카페누스 치세에 유대인 박해 이후 비잔티움과 불화를 빚은 카자르에 맞서 루스를 선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21]
스뱌토슬라프는 먼저 카자르의 동슬라브 속국 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뱌티치족처럼 그에게 가담하지 않은 부족들은 공격을 받았고 카자르가 아닌 키예프 루스에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당했다.[22] 초기 연대기에 기록된 전설에 따르면, 스뱌토슬라프는 뱌티치 지도자들에게 "너희에게 가겠다!"(고대 동슬라브어 )라는 간결한 메시지를 보냈다.[23] 이 문구는 현대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에서 (보통 )로 잘못 인용되지만, 누군가의 의도를 명확하게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카 강과 볼가 강을 따라 진격한 그는 볼가 불가리아를 공격했다. 그는 카자르와 불가리아의 우수한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아마도 오구즈 투르크와 페체네그 용병들을 고용했을 것이다.[24]
스뱌토슬라프는 965년경 카자르 도시 사르켈을 파괴했고, 아마도 크리미아의 카자르 도시 케르치를 약탈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점령하지는 않았다.[25] 그는 사르켈에 벨라야 비예자("흰 탑" 또는 "흰 요새", 사르켈의 동슬라브어 번역)라는 루스 정착지를 건설했다.[26] 이후 그는 카자르의 수도 아틸을 파괴했다.[27] 스뱌토슬라프의 원정 직후 아틸을 방문한 한 사람은 이렇게 적었다. "루스가 공격했고, 포도나 건포도 하나 남지 않았고, 가지에 잎사귀 하나도 남지 않았다."[28] 그의 카자르 원정의 정확한 연대기는 불확실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미하일 일라리오노비치 아르타모노프와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사르켈 약탈이 아틸 파괴 이후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29]
이븐 하우칼은 스뱌토슬라프에 의한 사만다르 약탈을 보고하지만, 루스 지도자는 카프카스 산맥 북쪽 카자르 중심지를 영구적으로 점령하려고 하지 않았다. 키예프로 돌아가는 길에 스뱌토슬라프는 오세티아인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복속시켰다.[30] 따라서 카자르의 후계 국가들은 그 지역에서 불안정한 존재를 계속했다.[31] 카자르 제국의 몰락은 키예프 루스가 초원을 가로질러 흑해를 횡단하는 남북 무역로를 지배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무역로는 이전에 카자르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더욱이 스뱌토슬라프의 원정은 살토보-마야키 문화 지역에 슬라브인 정착을 증가시켜 숲과 초원 사이의 전이 지역의 인구 통계와 문화를 크게 변화시켰다.[32]
즉위 후 이듬해인 965년에 동쪽으로 군대를 진격하여 오카 강 유역에 거주하던 뱌티치족과 싸웠다. 뱌티치족이 하자르 카가나트에 복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하자르 원정을 결심했다. 볼가 강 상류의 볼가 불가르 왕국을 거쳐 하자르 본토로 침입했다.
하자르는 서돌궐의 멸망 이후, 북서 유라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는 반유목 반농경 국가였으며, 그 영토는 볼가 강 하류를 중심으로 카스피해 북쪽 해안, 코카서스 북쪽 기슭, 흑해 북쪽 해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스뱌토슬라프는 투르크계 유목민인 구즈족과 연합하여 카간(왕)이 직접 이끄는 하자르 군대를 손쉽게 무찔렀고, 그 영토를 유린했다. 수도 이틸을 파괴한 데 이어 사르켈, 사만다르 등 하자르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했고, 코카서스 지방의 알란인과 체르케스인, 흑해 북쪽 해안의 톰토로칸 공국, 그리고 뱌티치족 등 하자르의 영향하에 있던 여러 국가와 세력들을 제압했다. 이 일련의 전투로 하자르 카가나트는 사실상 붕괴되었지만, 루스는 초원 지대를 확보할 힘이 없었고, 빈자리가 된 옛 하자르 영토에는 새로운 유목민인 페체네그족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루스에 의한 하자르 정복은 일반적으로 966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하우칼은 968년으로 전하고 있다.
3. 3. 2. 제1차 불가리아 원정 (967년 ~ 969년)
967년, 스뱌토슬라프가 이끄는 키예프 루스 군은 불가리아 제국에 침공하여 불가리아군을 격파하고 도나우 북안의 80개에 달하는 요새를 점령했다.[34][35][36][37][38] 이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니케포로스 2세가 불가리아 내전을 기회로 키예프 대공국과 연합하여 남북에서 불가리아를 협공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스뱌토슬라프는 도나우 강 하구에서 약 80km 상류에 위치한 요충지 페레야슬라베츠(현재 몰도바 영토)에 입성하여 이곳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페체네그족이 키예프를 포위하자,키예프를 포위했다. 섭정 올가와 군 사령관 프레티치 등의 지휘 아래 간신히 페체네그족의 공격을 견뎌내고 스뱌토슬라프에게 급히 귀국할 것을 요청했다. 스뱌토슬라프는 급히 키예프로 돌아와 페체네그족을 격퇴했지만, 어머니와 귀족들에게 키예프에서 페레야슬라베츠로 거처를 옮길 것을 선포했다. 올가는 이 결정에 반대했지만, 스뱌토슬라프는 굳은 결의를 보였고, 올가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
사흘 후 올가가 사망하자, 스뱌토슬라프는 장남 야로폴크를 키예프에, 차남 올레그를 드레블랴네족의 땅에, 삼남 블라디미르를 노브고로드에 각각 분봉하여 후방의 걱정을 없애고, 많은 종사단을 이끌고 페레야슬라베츠로 이주하여 이후 이곳을 근거지로 발칸 반도로의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했다.
3. 3. 3. 제2차 불가리아 원정 (971년)과 동로마 제국과의 충돌
971년 초, 스뱌토슬라프가 이끄는 루스 군은 다시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루스 군은 먼저 불가리아에 탈환당했던 페레야슬라베츠를 재점령하고 도나우 강 유역을 제압했다. 더 남하하여 동로마 제국령 트라키아(Θράκη)에 침입하여 필리포폴리스(Φιλιππούπολις)를 점령했다. 그러나 여기서 동로마 황제 요한네스 1세 침이스케스(Ιωάννης Α' Τσιμισκής)가 반격에 나서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루스 군을 패퇴시키고, 패주하는 루스 군을 추격하여 불가리아에 들어가 불가리아의 수도 프레스라프(Преслав)를 탈환했다.[55]
스뱌토슬라프는 도나우 강 하구 부근 불가리아 북부의 시리스트라(Силистра)까지 후퇴하여 2개월 동안 이곳에 농성했다. 그 후 루스 군은 성을 나와 동로마의 포위군을 돌파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스뱌토슬라프는 어쩔 수 없이 요한네스 1세와 강화하고 발칸반도(Βαλκάνια)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약속했다. 이 강화에서 비잔티움 측은 루스의 불가리아 침략을 묵인했다.[55]
두 차례에 걸친 불가리아 원정은 결국 루스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이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불가리아 제국은 급속도로 약체화되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에 의한 재정복의 길을 걷게 된다.
3. 4. 죽음과 유산
945년 아버지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이 드레블랴네족에게 살해당하면서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나이가 어려 어머니 올가가 섭정을 맡았다.[43] 964년부터 친정을 시작해 발칸반도 원정에 나서는 등 키예프 대공국의 세력을 확장했다.[43]
972년 불가리아 원정 도중 전사했는데, 비잔티움 황제가 페체네그 칸 쿠랴를 부추겨 스뱌토슬라프를 죽이게 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토스가 저서 『국정론』에서 러스와 페체네그 사이의 분쟁을 조장하는 정책을 제시한 것과 일맥상통한다.[43]
『초록 연대기』에 따르면, 스뱌토슬라프는 드니프르강(Днепр) 급류를 건너려다 페체네그족의 매복에 걸려 살해당했으며, 그의 두개골은 페체네그 칸에 의해 술잔으로 만들어졌다.[44][57] 키예프로 돌아가기 위해 드네프르강을 거슬러 올라가려 했으나, 항해 중 급류라는 난관에서 페체네그족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강 하구 부근에서 겨울을 지냈다. 그러나 이듬해 봄이 되어도 페체네그족은 여전히 떠나지 않았고, 그는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행 돌파를 시도했으나, 선단은 급류에서 페체네그족의 공격을 받아 전멸했으며, 스뱌토슬라프 자신도 살해당했다.[57]
스뱌토슬라프의 죽음과 함께 루시의 "영웅 시대"도 막을 내렸고, 이후 장남 야로폴크가 대공 지위를 계승했다. 스뱌토슬라프 사후, 그의 아들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적자 아들인 올레그와 야로폴크 1세 사이에 976년 전쟁이 발발했고, 그 결과 올레그는 죽임을 당했다. 977년, 블라디미르 1세는 올레그의 운명을 피해 해외로 도망쳤고, 바랑인 군대를 모아 978년 귀국했다. 야로폴크는 살해되었고, 블라디미르는 키예프 루스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4. 가족
스뱌토슬라프 1세의 가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스뱌토슬라프는 여러 자식을 두었으나, 아내의 기원은 연대기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945년 루스-비잔티움 조약에는 올가 이후 가장 고귀한 루스 여성으로 프레드슬라바(Predslava), 볼로디슬라프(Volodislav)의 아내가 언급되어 있다.[61] 프레드슬라바가 올레그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바실리 타티셰프(Vasily Tatishchev)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그는 프레드슬라바가 헝가리 귀족 출신이라고 추측했다. 조지 베르나드스키를 포함한 많은 역사가들은 볼로디슬라프가 이고르의 장남이자 상속자였으며 올가의 섭정 기간 동안 어느 시점에 사망했다고 추측한다.[18]
스뱌토슬라프는 아내로 말미암아 야로폴크 1세와 올레크를 얻었다.[61] 출신이 불분명한 여성인 말루샤(Malusha) 사이에서는 블라디미르를 두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이교도 신앙을 버리고 키예프 루스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19] 요한 스킬리체스(John Skylitzes)는 블라디미르에게 스퍙구스(Sfengus)라는 형제가 있었다고 전했는데, 이 스퍙구스가 스뱌토슬라프의 아들인지, 이전이나 이후의 남편과의 말루샤의 아들인지, 혹은 관련 없는 루스 귀족인지는 불분명하다.[20]
5. 평가
6. 대중문화
스뱌토슬라프 1세는 뛰어난 군사적 업적으로 인해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오랫동안 영웅으로 추앙받았다.[45] 특히 러시아-튀르크 전쟁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한 스뱌토슬라프의 진격은 예카테리나 2세의 남진 정책과 발칸 반도에서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근거로 여겨졌다.[45]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야코프 크냐즈닌은 1772년 비극 ''올가''에서 스뱌토슬라프를 주인공으로 다루었으며, 니콜라이 니콜레프도 스뱌토슬라프의 삶을 소재로 한 희곡을 썼다.[45] 이반 아키모프는 1773년 그림 ''도나우 강에서 키예프로 돌아온 스뱌토슬라프''에서 군사적 명예와 가족애 사이의 갈등을 묘사했다.[45] 19세기에는 클라브디 레베데프가 스뱌토슬라프와 요한 황제의 만남을 묘사한 그림을 그렸고, 위진 란세라이는 20세기 초 스뱌토슬라프의 기마 동상을 조각했다.[45] 벨리미르 흘렙니코프는 1913년 시 ''전쟁 전에 쓰여진 글''에서 스뱌토슬라프를 호전적인 슬라브족의 전형으로 묘사했다.[47]
스뱌토슬라프는 소설과 영화에서도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사무엘 고든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 또는 카자르의 몰락''에서는 악당으로,[48] 바딤 빅토로비치 카르갈로프의 이야기 "체르니예 스트렐리 비야티차"에서는 긍정적인 맥락으로 등장한다.[49] 2005년에는 비야체슬라프 클리코프가 카자르족을 물리친 스뱌토슬라프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 기념비는 다윗의 별과 콜로브라트를 든 카자르인을 짓밟는 루스 기병을 묘사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50] 파먄 및 기타 반유대주의 단체와의 관계와 러시아의 모든 유대인 단체에 대한 극단주의 여부를 검토해 줄 것을 검찰총장에게 요청하는 논란이 많은 "500인의 편지"에 참여한 것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50] 벨고로드 지역 행정부의 언론센터는 계획된 스뱌토슬라프 기념비가 아직 건설되지 않았지만 "모든 국적과 종교의 대표자들에 대한 존중"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51] 동상이 공개되었을 때 방패에는 12각 별이 새겨져 있었다. 알렉산더 마진의 책 ''크냐즈''와 ''영웅''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며,[52] 소련 영화 ''공주 올가의 전설''에서도 주요 역할을 맡았다.
2011년에는 우크라이나 어부가 스뱌토슬라프가 살해된 곳 근처 호르티차의 드니프로 강에서 1미터 길이의 칼을 발견했는데, 이 칼은 스뱌토슬라프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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